"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잊은 순간 역사는 타인의 손에 넘어갑니다. 오늘 이야기할 주인공은 바로 우리가 종종 놓치고 마는 "발해(渤海)"입니다. 교과서 속에서는 몇 줄로 끝나지만, 이 나라는 무려 200년 이상 존속하며 동아시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국가였습니다.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세운 발해,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 고구려의 유민, 대조영의 기지 – 발해의 건국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반도는 안정되었지만, 만주와 대동강 이북은 당나라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의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유민 대조영은 만주에서 일어난 혼란을 틈타 말갈족과 연합, 당나라에 반기를 들고 독립을 꾀합니다.
그 결과, 698년 동모산에서 ‘진’이라는 나라를 세운 후, 당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발해’로 고치며 명실상부한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 + 말갈족의 연합왕국이었지만, 실질적 주도권은 고구려계가 쥐고 있었고, 문화적 기반도 고구려의 것을 잇고 있었습니다.
2. 제국의 위엄 – 해동성국 발해의 부흥
발해의 역사는 대조영 이후 세 왕조로 나눌 수 있습니다.
📌 무왕(대무예)의 개척과 강경 외교
무왕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강력한 대외정책을 펼쳤습니다. 흑수말갈을 공격하고 장문휴를 통해 당나라 해군기지를 급습하는 등 위세를 떨쳤죠. 이로 인해 당나라는 발해를 더 이상 하찮게 볼 수 없었습니다.
📌 문왕(대흠무)의 내치 안정과 국제외교
무왕의 아들 문왕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내정을 안정시키고 당, 일본 등과 외교를 강화하면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 국제적으로 독립 국가임을 천명했습니다. 당나라와 친교를 맺고 불교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는 등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시기였습니다.
📌 선왕의 중흥 – 영토 확장과 고구려 재현
10대 선왕 시기, 발해는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과거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고, 연해주까지 지배하는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중국은 이를 보고 ‘해동성국(海東盛國, 바다 동쪽에서 번성한 나라)’이라 부를 정도였죠.
3. 발해의 독자적 정치체제 – 고구려+당의 절묘한 조화
발해는 정치·행정 제도에서도 고구려의 전통과 당나라의 문물을 조화롭게 받아들였습니다.
🎖️ ① 3성 6부제 도입
중앙 정치 체제로는 당나라의 관제를 참고한 3성 6부제를 운영했습니다. 이는 입법·행정·감찰 기능을 분리한 체계로,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제도였죠. 각 부서에는 고구려계 인사들이 주로 등용되어 지배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 ②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
수도를 포함한 ‘5경(서울 5곳)’과 15개 부, 62개 주로 나눈 지방 행정 체계도 고도의 통치 기술을 보여줍니다. 지방에 대한 효율적인 통제와 인재 양성을 가능케 했습니다.
4. 발해의 문화와 기술 – 고구려의 부활
발해는 단순한 군사 강국이 아니었습니다. 문화, 기술, 외교, 무역 모든 방면에서 당대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문명을 구가했습니다.
🏛️ ① 고구려 양식의 계승
무덤양식, 기와 문양, 온돌 구조 등에서 고구려 문화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문왕 시기의 수도 상경용천부는 당나라 장안성을 본뜬 계획도시로, 정연한 거리 구조와 궁궐, 사찰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 ② 활발한 국제 교류
발해는 일본, 당나라, 돌궐 등과 외교 사절을 주고받았습니다.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표기하며 고구려의 정통성을 자처했습니다. 이는 국가 정체성과 자주성을 확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5. 발해의 멸망과 잊힌 역사
926년, 강대한 거란족의 침입으로 발해는 멸망하게 됩니다. 마지막 왕 대인선은 항복하고 나라의 기틀은 무너지지만, 발해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 이후 ‘발해 유민과 고려의 통합’이라는 새로운 민족사적 전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역사는 이후 오랜 시간 "잊힌 역사"로 남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발해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18세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를 통해 다시 발해의 가치를 조명하며 남북국 시대 개념을 제안한 것이 전환점이 됩니다.
📌 발해의 핵심 정리
1. 발해의 건국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진’을 세운 뒤, 국호를 ‘발해’로 바꿈. 고구려의 계승 국가로 시작됨.
2. 고구려·말갈 연합 국가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연합하여 세운 다민족 국가. 지배층은 고구려계, 피지배층에는 말갈계 포함.
3. 무왕의 강경 외교와 군사 활동
장문휴를 통해 당나라 산둥반도를 공격하고, 신라·흑수말갈과의 대립 등 외교·군사적 긴장 고조.
4. 문왕의 문화 융성과 외교 강화
수도 상경 용천부 건설, 불교 진흥, 당나라·일본과 외교 활발. 자주적 연호 ‘대흥’을 사용함.
5. 선왕 시기의 영토 확장과 해동성국 칭호
고구려 옛 영토 회복, 흑룡강과 연해주까지 확장. 중국 측 사서에 ‘해동성국’으로 기록됨.
6. 3성 6부제 운영 (당 제도의 수용)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정부를 입법·행정·감찰 기능으로 분리한 3성 6부제를 운영.
7.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 구축
수도 포함 5개의 핵심 거점(5경), 15개 부, 62개 주로 효율적인 지방 통치 시스템 확립.
8. 고구려 문화를 계승한 고고학적 유산
온돌, 고분, 불상, 기와 문양 등에서 고구려와 유사한 유물 다수 발견. 문화적 연속성 입증.
9. 독립국으로서의 외교 활동
일본, 당, 거란 등과 독자적인 외교 전개.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국왕’이라 칭함.
10. 거란 침입과 멸망 (926년)
거란족의 침공으로 멸망. 발해 유민 다수가 고려로 이주하여 민족 통합과 계승의 연결고리 형성.
🔍 발해를 둘러싼 역사 논쟁 – 왜 지금 중요한가?
21세기 들어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왜곡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핵심 논리는 ‘발해 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았다’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발해는 자체 연호를 사용하고, 국서를 자주적으로 작성하며,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기에 명백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고고학적, 문헌적 근거로 뒷받침됩니다.
✨ 마무리 – 사라진 것이 아닌, 잊힌 나라
발해는 단지 고구려의 그림자가 아니라,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또 하나의 찬란한 제국이었습니다. ‘해동성국’이라는 별명은 그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발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뿌리를 지키는 일이며,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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